밤 10시 로데오 거리
그땐 알지 못했다.
그저 기승을 부리던 햇살 조금 사그라지니 덜 사막 같고
선글라스 필요 없는 시각이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 뉘엿뉘엿 해 넘어가며 대신 불빛이 거리로 스며들기 시작한
저녁 8시가 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휘트니스 센터 간다며 집을 나선 거-.
날개 파닥거리며 재촉하는 펭귄의 잦은걸음처럼
초록 신호등이 깔아놓은 주단을 밟듯 길 건너 로데오 거리로 들어서자,
밝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지인에게 선물하고픈 보청기 파는 곳
더는 엑스레이 사진 상에도 어깨 이상이 없다고 나오니
이제라도 시작해 볼까 싶은 골프 연습을 할 수 있는 곳,
패션으로 이름 난 로데오 거리에는 탁구장도 있었다.
세 곳 중 한 휘트니스 쎈터에서 가볍게 운동을 했다
"지금 밖에 비 엄청 온다. 걷지도 못 해. 천둥 번개두 쳐. 완전 죽음이야 !"
"자기니? 집에 가야하는데, 나 데리러 올 수 있지?
늦은 거 알아. 하지만 창밖 좀 보라구... ..."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보니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소낙비에
집에 돌아가기 위해 통화 중이다.
저렇게 최소한 가까운 누구든 부를 수있다는 사실이
새삼, 내게 카랑카랑한 바다를 몰고 오며
캄캄한 현상실 약품에 담긴 젖은 사진처럼
세월 흘러도 희미해질 줄 모르는
이십 대 어느 날의 자신을 들춰내고 있었다.
마치 님에게서 받아야 할 기별 놓친 듯
그날은 소공동에서 종로 2가 84번 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며
긴 머리 타고 빗물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속옷까지 흠뻑 젖도록 맞았었다.
옷의 물기 대강 쥐어짠 채 버스에 올라
비 내리는 버스 차창 밖의
푸른 눈물 그렁그렁한 너의 바다를 꿈꿨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이마로 떨어져 하늘을 올려다보기는 했어도,
회색빛 하늘 아래 너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 말고는
정말 달라질 것 없는 지루한 일상을 한꺼번에 수장시킬 듯
푸른 멍울 하나 없는 빗줄기가 세상을 낭만으로 회복시키고 있다는 것은.
"우박이네. 우박이어라우. 워메 이쪽으로 오네유. 형님, 난중에 전화혀유.
빨래 걷으라고 집에 전화혀햐 하니께. 이거시 뭔 일이래...."
소도시의 이름 모를 거리에서 갑작스레 일어난 이 사태는
좁은 폭의 시내가 강이 되고 그 강이 흘러 바다 어귀를 찾아 가듯,
밤새 하얗게 잠 비어나간 내 머릿속을 순식간에 채우며 들어온,
그리움의 물살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동서 횡단 하느라 하이웨이 I-40 등 이곳저곳 달리다
떡 하니 눈앞에 버티고 있는 소낙비를 만나게 되면,
내 차가 그 소낙비 사이로 커튼 젖히듯 들어서거나
소낙비가 먼저 주춤하는 나를 향해 덮쳐오곤 했는데,
살며 그런 급한 빗줄기 한국에서도 맞아볼 일 있으려나
바로 오늘 아침에도 흐린 하늘 보며 그런 회상 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시간 후인 같은 날 오후,
우박으로 보일 정도의 무겁고 굵은 빗줄기 내 눈앞으로 다가서다니...
마치 맑은 하늘의 그 아름다운 푸른빛조차
너를 볼 수 없음에 깊은 회색빛 우울로 바뀌더라며,
불과 몇 초 만에 종일 내린 만큼의 많은 빗물들 거리로 넘쳐나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사연이 허공을 떠도는 듯 했다.
비 피해 들어선 유리 상자 같은 버스 정거장에서
아마도 난, 백설 공주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듯 눈을 감았고
비 전령의 발자국 소리 같은 또릿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그만 잠에서 깨, 날 좀, 바라 봐.』
마치 네가 바로 신호등 건너편에서 기다리다 한 달음에 건너오기라도 하는 듯
비 그치며 그 음성에 정갈하게 가슴 틔워진 나는
환한 햇살 넘쳐나는 길을 지나 싱그러운 초록 들을 달리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