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나리의 추억
1980년대 초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막 도착해서는 한동안 언어의 벽도 벽이었겠으나,
대강 1년여 정도는 거의 그 누구와의 대화도 없이라디오와 텔레비전만 보며 지냈던가 싶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먼저 와서 자리 잡은 선후배 관계로 이어지는 유학생 사회에서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자리 잡은 이들이 새로 온 식구들을 도와주는 것이 통례였기에,
당연히 그들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맨 처음 마중 나왔던 선배들 가족과 두어 번 만난 것을 제외하면
거의 1년 넘도록 다른 한국에서 온 유학생 부인들이 내가 같은 주차장을 사용하는 한국에서 온 여자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지냈었다.
결국 처음에 인사 나눌 기회를 놓치게 되자 한동안 세월이 흐른 뒤에는 새로 온 누구라고 알릴 기회도 사라져갔고,
오랜 세월이 지닌 지금은 새삼 내가 한국인 누구라며 소개하기도 뭐해
나도 그렇고 그들 역시 그동안 아는 이도 없이 혼자 지냈다는 내게 얼마나 외로웠겠느냐며 미안할 일도 아닌데 미안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생각하니 그랬다는 거지 그렇게 살던 그 당시는 늘 그렇게 지내는 것이 일상 이었기에
혼자 있어서 답답했다거나 외롭기는커녕 단절이라는 걸 내 천성대로 평온함이라 여기며 즐겼다고까지 기억된다.
그 누구도 날 건드리지 않고 뒤섞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누릴 수 있는 특혜쯤으로 여기며
그 당시 유행했던 가요 테이프 몇 개와 지인으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잘 다룰 줄도 모르는 만돌린으로 기타를 치듯 노래의 음도 흥얼거리며
초원을 산책 하는 것이 내게는 유일한 오락이자 낙이었다.
그렇게 살던 신혼 초, 도착한지 넉 달 쯤 되었던가…….
매일 새벽 6시면 식사를 하고 도시락 두 개를 들고 학교에 가 오후 5시나 되어야 돌아오고,
저녁을 먹은 후 다시 30분 만에 나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자정 즈음에야 돌아와
쓰러지듯 잠들곤 하던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서로 얼굴 마주 볼 짧은 저녁 식사 시간에도 말없이 무슨 생엔가 잠겨 있는 모습에 이유를 알 리 없던 나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공부가 힘들어 지친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무튼 그 주 주말이던가, 저녁을 먹은 그가 맥주를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런데 맥주를 내오자 식탁 위에 수첩 하나를 올려놓으며 읽어 보라는 듯 조용히 내 앞으로 내미는 거였다.
………….?
수첩에 흘리듯 적힌 낯익은 글씨를 읽어 내리다 그만 난, 그 내용에 눈물이 날 뻔 했다.
그 글이 당신이 적은 것 맞지 않느냐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묻는 의미였겠지만,
대답은커녕 끝까지 읽지도 못하고 웃음이 터져나오고 눈물이 날 뻔 했다.
무엇엔가 지친 듯 보이던 분위기가 이것 때문이었다니…….
맥주 때문인지, 어이가 없어서인지, 한 번 터진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그 메모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적은 나의 글이 아닌 구창모라는 가수가 부른 '희나리' 가사였는데,
그걸 알게 된 그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말 한 마디 못한 채 지낸 며칠 동안의 행동이 민망해
긴 방학이라도 시작해 여유 있다는 듯 아예 맥주를 더 가져 와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난, 그치나 싶다가 다시 터지고, 끝났나 싶으면 다시 막 시작한 듯 웃었다.
하지만 입 벌리고 웃는다고, 소리 내 웃는다고 전부 웃음 아니듯,
난 그렇게 핑계를 대서라도 마음껏 웃고 싶었던 걸까.
무대의 막 내려오고 다시 빠져들 침묵을 피해 부러 그치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었을까.
웃음은 방 안 가득하던 연기가 빠져나가듯 아주 천천히 멈췄다.
농담도 잘 하지 못하고 말 수 또한 적은 그가 하는 유일하게 재미난 이야기가
그의 학창 시절과 그의 친구들에 대한 거였는데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등장한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날도 저녁 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도 포기한 그가 억측으로 인한 자신의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시작한
적당히 취기 오른 한 말투로 예의 그 학창시절 일화를 풀어내는 것을 소파에 앉아 듣도 있었는데,
아마 오늘만큼은 그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했던가.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난 그의 이야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식탁을 비추던 삿갓 조명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 위로 만들어내던 그림자 뒤로 숨어있던
배경으로 틀어놓은 희나리의 추억이란 노래가 만들어 낸 아련한 영상을 흘끔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 華雨 정혜정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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