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사춘기였던 華雨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건데
지루해 아마도....거의 끝까지 읽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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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내고 있는 방을 어지르는 일은 언제나 재미 있었다.
가장 즐겨하던 시기는, 그것이 습관이 아닌 어떤 비정서적 발상을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사춘기가 지났다 여기던 고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어.
난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종로, 청계천, 을지로의 길 순서도 잘 몰랐는데,
그 까닭이 해가 진 후 아직 집 밖에 있다는 것이 절대로 허락 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는데,
웃겠지만 그 덕에 학원이라는 곳은 고 3 때 딱 한 번,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서야 했던 국사과목을 들으러 다닌 적 말고는 없었어.
그런데 왜 하필 국사과목이냐며 궁금 하겠지.
그건...사실, 내가 암기하는 것을 치명적이라 부를 만큼 싫어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정말 그 어떤 것도 외우지 못해서는 아니었을,
외워서 시험을 치뤄야 한다는 행위 자체를 싫어한 것에서 비롯된
반항적 자기최면의 현상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
암기가 필요한 과목인 줄 알면서 시험 보는 날까지 책 한 번 들추지 않았으니 그만, 요행도 비켜갔고
단 한 개도 정답을 아는 것이 없던 난, 쉽게, 늘 거의, 꼴찌 였을 거야.
아는 것 없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어떤 과목은 운좋게 전교 1등을 하기도 했는데
좀처럼 공부라는 것을 하지 않던 내겐, 그래서 꼴찌도 1등도 별로 다를 것 없다고 느꼈었어.
그런데 졸업을 한 지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주 가끔이지만 시험을 봐야 하고
다들 죽어라 공부하는데 나만 교과서가 없는 류의 꿈을 꾸기도 한다.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꿈에서라도 공부를 하려는가 본데
마음과는 달리 이번엔 책이 없는 꿈을 꾸는 거야....
재미있는 건, 그 당시는 부러 책을 넣지 않고 학교엘 간 건데
현실 속 꿈엔 책을 갖고 싶지만 없는 것으로 나온다는 연관성에 관한 점이야.
마치 임신해 입덧하는 여자가
먹고 싶어지는 것은 임신 전 제일 잘 먹지 않던 류의 음식더라는 것처럼.
하교할 때 갈아타곤 하던 205번 버스에 매달리듯 집에 돌아오면
난 곧장 2층 내 방으로 올라가 틀어박히곤 했다.
하지만 난 그것을 틀어박힌다가 아닌, 스며드는 거라고 정의 했고.
마법처럼 안락한 나만의 장소로 스며들어 그 안에 천국을 만들었어.
선 하나만 그어놓아도 95점 최고점수를 주시던 미술 선생님.
국전 대상을 받으셨던 선생님께서 왜 그랬는지
난 아직도 그분의 나에 대한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 수업시간만큼은 눈 총총 선생님의 어떤 말씀도
제일 흥미로워하며 들었기 때문이었을 때문일지도 몰라.
하기야 좀 이상하긴 했지.
수업시간 시작이 한참 지나도 나타나질 않으셔서 미술실로 찾아 가면
대부분의 경우 어제로부터 이어진 깊은 잠에 빠져 계셨다는데.
국전 대상을 받으셨던 조각이 전공이시던 선생님은
그런 날은 수업에서 15일동안 감지 않은 머릴 주제 삼아
공간과 라면 발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대해
1시간 내내 알아듣지도 못할 강의를 하시기도 했어.
끝나는 종이 울려 나가실 때 지루해 졸고 있던 아이들이 곧바로 책상에 엎어져
잠에 빠져드는 걸 보고 미술 시간이면 기본으로 들고 다녀야 한다며
물감도 가지고 오지 않는 멍청이들이에겐 미술을 가르칠 수 없다고 소릴 지르시기도 하고.
그때도 지금도 난, 충분히 그 선생님의 괴팍한 관념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그래서 섣부른 그림 보이고프지 않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
물론 엄니의 예체능계 진학 반대 의사도 심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난 일단 2층 내방에 올라가 가방을 던지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방문부터 눌러 잠그곤 했어.
그리곤 누런 연습장에 이렇게 저렇게, 혹은 굵게 더 굵게,
죽죽 선 그은 종이들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 놓기 시작했지.
특히 세상의 모든 직각이라는 것에 짜증이 날 때면,
조금씩 갱지 연습장을 한장씩 띁어 그 귀퉁이를 찢거나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발로 구겨
거꾸로, 바로, 차례로 늘어놓거나,
30센티 높이에서 떨어뜨려 방바닥으로 내려앉는 그 상태로 두거나 했어.
그러면, 그렇게 내려앉는 모습이라는 것에서 벗어난
우리가 말하는 부자연스러움 속 메어있지 않은 정신이라는 것이,
한 장소에서 움직일 수는 없음에도
자유스러운 자연스러움과 같은 형태일 수도 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었지.
그것만이 아닌, 서랍 속의 모든 물건들은 방바닥으로 이사를 시키기도 했어.
꼭 예쁠 필요 없이, 아주 오래된 낡은 종이라든지 얼굴처럼 생긴 돌,
그리고 인형이라 부르는 나뭇가지, 도화지로 오려 만든 어떤 모양.
그런 모든 것들이 내게는 그 어떤 물건보다도 특별했기 때문이야.
난 예쁘기만한 인형도 예쁜 짐승도 예뻐 보이지 않는,
인형은 맹해야 인형이고 집짐승은 꾀없이 좀 얼뗘야 예쁜 거라 여기는,
무엇이든 조화롭게 상품화된 것들은 나의 시선을 끌지 못했어.
뭐, 제일 촌스럽고 여기는 장소가 애들 가장 잘 가던 선물의 집 같은 곳이라 여겼으니까.
벽엔 무슨 액자가 걸려있었더라.
시덥지 못한 백일장이라는 글자가 박힌 종이..아니 상장보다는,
아, 참, 그러고 보니 어찌된 게 그런 것 한 장 남아있질 않네...
하지만 먼저 이 말 좀 들어봐.
그래도 모두들 그런 상장 한 장쯤은 훗날까지 보관할 줄 알았야했다고 할 테지만,
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공부도 별로 한 기억 없는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앨범 한 권이 없다는 거. 이해 되니...
유치원부터 17년을 다니며 앨범 한 권이 없다는 거..
이거 정말 웃기는 일 아니겠어...
공부는 담 쌓았다고 해도 앨범은 그런 게 아니지...
세상 살며 최소한 그거, 졸업사진은 있어야 하는 거지,
지하실 한 쪽 구석에 뒀다가 집일하던 아이가
헌 책과 함께 엿바꿔 먹도록 몰랐다는 건 말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늘 중요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의 기준은,
언제나 내 고집에 의해 나누지는 터라, 한 번도 아까워 하지 않았다는 거지....
아무튼 그런 상장 대신, 내 방 벽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한 채 붙어 있던 것은,
오빠가 방 정리 한답시고 한 쪽으로 치워 둔 포스터였어.
카우보이 옷차림의 크린트이스트 웃드가 담배 피우는 옆모습.
내 생각에 그 당시 크린트이스트 웃드는
이소룡에게 밀려나듯 오빠 방에서 밀려났던게 아닌가 싶어.
하지만 난, 그 당시 그리 구하기 쉽지 않았던 배우의 커다란 포스터의
반짝이고 미끄러운 질감을 좋아했던 것도 같아.
그래 그 황야의 무법자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흐르는 곳을 따라
오른 손으로 따르듯 살며시 쓸듯 꿈을 꾸며,
이다음에 난 황금박쥐로 살아야지...아님 수퍼맨도 좋고 영 불가능하다면, 투명인간도 괜찮다며,
딱 유치원 생처럼, 누가 알까 창피하리만큼 실없는 생각을에 혼자 빙긋거리기도 했어.
하지만 어쩜 그 시기란,
기실 허깨비상상 속에 누가 자리 잡았는지 혹은 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을,
그저 모호함 뿐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그 당시 난 무엇이 되고 싶다기보단,
지금의 갑갑하다 느껴지는 나라는 존재에서 탈피하려면
무엇을 어찌하면 될 것인가에 몰두했었던 것 같아.
그 불만을 제거함으로 이상을 지니는 바탕에
토대를 가지게 되는 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문제겠으나,
탈출의 시도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의 부재로부터 비롯된 것임은
정확하게 말 할 수 있었던 시기.
그거였어. 바로.
아직 한창 사춘기였던,
확인되지 않는 자신에 대한 거친 호흡 같은 거.
학교 가다말고 그 당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천행 국철을 타고 항구로 향한다든지,
밥 먹듯 수업을 빠지며 강당에 가서 누워있는 내게 찾아온 반장으로부터
담임 선생님이 뒷마당 덩굴 벤치 아래로 오라는 말을 듣는다던지,
규율부여서 어렵지 않게 학교 시간 중 뒷문으로 빠져나가
바로 앞 고궁 옆문을 통해 들어가 그곳 연못가에 앉아 책 읽으며 시간 보내다,
종래가 다 끝난 후 학교로 돌아간다든지,
그래 선생님이 내 환경기록부를 들춰보기 전엔
가정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학생인 줄로 여기게 한다듣지,
수학 선생님에게 싸르트르의 구토를 선물 받은 학생으로
마흔 넘은 독신 여선생님과 동성연애한다는 소문으로 술렁이게 한다든지,
그렇게 난 학교에선 언제나 조용한 소음이고,
동시에 어설픈 말썽꾸러기였다.
머리카락 길이 귀밑 1센티로 정해져 있던 학교 규칙에,
그렇지않아도 숨 막혀 하던 애들 앞에 귀 위 1센티로 자르고 교문 앞에 나타나 모두를 질리게 한다거나,
그러면서도 1년에 단 한 명도 잡지 않는 규율 어기는 것을 재미로 알던 학생들에겐
바보 허술한 규율부 쯤으로 인식되던 시기.
하루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던 내가,
반에서 제일 떠드는 아이 적으라는 무기명 투표에 첫번째 떠드는 아이로 뽑힌 아이러니 등...
전체적으로 비사회적이며 단체에 부적합하게 보여
선생님도 잘 건들지 않고 은근히 동갑내기들에게는 친구 하자는 편지만 수백 통 받으면서도
밖으로는 늘 혼자다니는, 그래도 외롭지않던 시기.
주위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만들거나 그러한 대상으로 보였던가 싶어도,
실제로 가슴속에는 타인으로 부터 자신을 방어할
날카로운 손톱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던 나약한 아이였던,
그런 내가 지내온 사춘기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은
가장 웃고 함께 즐기는 것에 활동적이었어야 했을 그 시기 또래들과는 달랐는데,
어쩌면 살아가는 것 시시한 척 하면서도 사실은 반대였을,
그 방법이 달랐을 뿐 자기가 속해 있는 굴레로부터 해방된 듯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자
밖이 아닌,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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