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옮겨 오다보니 글에서도 오래된 냄새가 나는 듯 해,
지금 읽을 이들의 이해를 위해 몇자 적습니다. ^ ^
2005년 글이고 그 당시는 아이들이 아직 고등학생일 때이고
게다가 한국 이민자들이 많이 몰려사는 곳이 아닌 미국 소도시에 살던 시기,
그래 한국에는 골목마다 있는 노래방이라는 곳 하나 있을리 없고,
직장인들의 만남 아니고는 차를 마셔도 카페가 아닌, 대부분 집에서 만나던 곳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2층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누군가 벨을 눌렀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2층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래 전 한 번 만난적 있는 기요미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에서 온 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 좀 닦고 내려갈게요"
늘 이 길을 지나갈 때 마다 생각났었고 방문하고 싶었지만,
내게 받아 전화번호를 잃어버려서 못했다며
몇번이고 연락없이 찾아온 것에 대한 사과를 한다.
그녀와 나는 작년 9월 '스쿨 펀드 레이즈'를 하느라 학부모 모임(PTA) 주관으로
행사 때 쿠키와 빵, 과일등을 가져다 놓고 파는 일을 할 때 처음 만났다.
당시 둘째가 선수로 뛰던 필드 하키 팀에 그녀의 딸인 사라도 있었기에,
선수팀 학부형으로써 그녀와 내가 같은 부쓰에서 판매하는 일을 맡게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10학년을 새로 시작하는 9월 학기 시작에 맞춰
여름에 노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새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첫 인상이 좀 초췌해 보였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키나와에 군의관으로 왔던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살며 딸을 낳았고
함께
미국으로 왔지만 얼마 되지않아 이혼하게 되었고그곳에서 계속 딸과 둘이만 살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거라고 했다.
미국인들은, 아니 미국이란 나라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라면
한국보다는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신경을 덜 쓴는다는 것인데,
기요미상은 천성인지 오래살다보니 변했는지 미국인 닮아가는 듯
쉽지않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에 망설임이 없는 듯 보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일본말 하는 사람을 만나서인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스쿨 부쓰에서 일하는 동안 내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어찌보면 모르는 사람이기에 보따리를 풀어놓기 용이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아무튼,
필드하키 경기가 끝나고 각각 자신의 애들과 함께 돌아가게 되어서야
급하게 내 전화번호를 받아적고는 아쉬운 듯 헤어졌었다.
오랜시간 외롭고, 가슴 아팠겠구나, 외국에 미국 남편 한 사람 믿고 건너와
정말 마음 고생 심했겠구나..하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날 밤 이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거라 나도 무척 반가왔다.
인사한 후 가져온 후지 사과 한아름을 식탁에 올려놓는 그녀의 얼굴이 예전보다 밝아보였다.
특별하게 나아진 것 없고 너무 외롭긴 해도
예전 살던 곳에서 떠나고나니 마음이 편하더란다.
"기요미상, 지금 자신이 갖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잘 알듯 인생이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 외롭거나 쓸쓸한 마음을 밀어내려고만 하지말고
나처럼 새 친구도 만들고 앞으로도 이런저런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하자구요.
어찌하면 더더욱 인생을 즐겁게 엮어나갈 수 있을까 그것만을 생각하도록 해요."
어얼그레이 티를 홈메이드 파운드 케잌과 함께 내어
한 조각 씩 나누며 대화를 하다보니 어느 새 두어 시간이 흘렀다,
애들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동양 그로서리엘 다녀와야 한다고 하자,
오랜만에 만나게 된 친구와 헤어지기 싫었던지 자신도 사야 할 것이 있는데
데려가 주겠느냐며 그 자리에서 나를 따라 나섰다.
최고 기온 15도 최저 9도.....얼마나 날씨가 좋던 지, 우리는 그저 즐거웠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포이즌의 '아이러브 유'라는 원곡을 부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오자키 유타카 (OZAKI YUTAKA)'의 CD를 틀려 줬다.
열다섯 살 때부터 작사 작곡을 시작하며 노래 부르던 그가
스물 여섯살 되던 1992년,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으니....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39세가 되는 이미 젊지 않은 나이라고는 해도
일본 사람들에겐 미소라히바리와 같이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가수다.
내가 가지고 있는 CD는 그가 이 세상을 등지기 직전 반주없이
자신의 통키타를 두드리며 불렀던 노래들이 수록된 아주 드문 것인데,
난 그것을 운 좋게도, 고베에 있는 어느 중고 CD 가게를 돌아다니다 발견했었다.
1995년 전 세계를 히틀러의 가스 사건 이후 가장 경악하게 만들었던
'도쿄 츠카데츠 가스 사린 지켕' (동경 지하철 가스 살인 사건)을 일으킨
오므 신직교의 주교인 '아소하라'가 그 당시 일본 청소년의 우상이던 오자키를 추스려
자신의 사이비 종교 단체에 입단시켜 그 세력을 확장 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오자키가 말을 듣지 않자 살인 가스를 사용해 죽이고 자살화 시킨 거라는 등
증거 없는 추측이 도쿄 가스 폭발 사건이 터지자 여기저기 불거져 나오기도 햇으리만큼
오자키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는 그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한 끊이지 않을 듯 싶다.
아무튼 그가 죽기 전인 마지막 티비 인터뷰 하는 것을 본 이야기 등을 대충 들려주자,
기요미상은 갑자기 막혔던 말문이라도 트인 듯 이런저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금세 팬이 된 듯 몇번 밖에 듣지 않은
CD에서 흘러나오는 오자키의 노래를 신나게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온통 싯구절 같은 그의 노랫말은 다분히 패시미스트적인 것이어서
그리 신나게 따라 부를 노래는 아니지만,
가사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기요미상에게는 좀 흥분되어 보였다..
사실 좋은 노래나 좋은 글, 그림등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란,
그것이 언제 만들어진 것이든 그것을 발견했을 때 눈부신 햇살처럼
그 느낌이 가슴 깊숙이 와닿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녀도 그래서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차를 달리며 나도 같이 흥얼흥얼~~
40대 중반도 훨 넘긴 나이라 그동안 인간관계가 많이 부드러워졌을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처럼 기분 별루일 적 친구와 대화 하거나
기분 좋게 한 잔 마실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이곳에서는,
같은 동양인인 것 한 가지만으로도 동질성을 느끼게 해 금세 친해지는 것 같다.
마음 내키면 들릴 수 있는 노래방이라는 곳 한 곳이 없는 이곳에서는,
그나마 이렇게 하이웨이를 달리며 차 안에서 부르게 되는 경우가
차안에 흐르는 노래를 따라 친구가 부르는 노래에 함께 흥얼거리기도 하며 즐거웠던 오후..
가슴 가득 훈훈한 정이 이는 날이었다.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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