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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렘이 이끄는 생 (詩와수필)/Like everyday life 1

보고싶은 얼굴

by HJC 2010. 8. 2.

 

 

 

 

 

 

 

 
 

 

 

다른 해는 당신께 귀염 받던 일, 심지어 호되게 야단맞던 일들도

소소한 행복으로 당신 떠올리게 하더니,

올해는 당신의 마지막 음성이 사무치게 귓전에 맴돌아 종일 말을 잃습니다.

 

 

 


 

“화우냐?”

“네 아빠. 별일 없으시죠?”
“그럼. 다 좋다. 근데 루시아는 말 잘 듣고?”
“그럼요. 씨씨을은 여전히 맨 날 "I'm a BABY". 라며 어리광이구 루시아는 지가 아예 어린아이인줄조차 모르는 아이라
 정말 얘 같으면 저, 애 열도 키우겠다니까요, 아빠! “
“하하..그 놈 참... 그래. 좋은 일이다.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 한 거야. 니 엄마 바꿔줄게.“

“야, 화우야. 잘 있지?  호호.. 너 저번 편지 글 중간중간 쬐그맣게 그려 보낸 그림들 보고 
  우리 모두 얼마나 웃는 줄 아니? 오늘은 힐튼 가서 니 아빠 안경도 맞추고 양복도 새로 하고 

  커피 마시며 데이트도 했다. 그러니 너희도 60대 늙은이들처럼 굴지 말고 엄마처럼 좀 잼나게 살아. 알았지?”

  (또또또... 애 붙잡고 쓸데없이...)

 

아빠의 말씀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지만,
그날 내 이름을 불러주시던 아빠의 음성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평소 매우 엄하셔도 그것을 딸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아시던 분이라

생활 전부가 늘 규제 속에 있었고 무엇 한 가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빠라는 호칭 만큼에는 예외를 두고 싶으신 듯

결혼 후에도 아버지라 부르는 대신 아빠라 불러드려야 좋아하셔서
일부러 그렇게 부르기를 바꾸지 않았었다

 

씨니어 골프 회장직을 맡고 계시던 아빠는 싱글 중 싱글이셨는데,

더위가 매우 심했다던(난 80년대 조부터 미국에 살고 있어서 알 수 없었던-)

94년 여름인 7월 어느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골프 후 집에서 샤워를 하시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티비 채널을 돌리시다 혼수상태가 되신 거라 했다.
182cm, 71kg의 건강한 체격 이셨지만
본태성고혈압은 피하지 못하시고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1994년 오하이오 주 cincinnati에서 오빠의 전화를 받은 것은

혼수상태 사흘째 밤 11시 경이었다.

나랑 통화를 하신 다음 날 그리 되셨다니

내게는 위의 아빠와의 통화가, 마지막 말씀이 되신 거였다.

오빠는 평소 성격대로 사흘 되셨는데 곧 깨어나실 거라고 차분히 말했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이상하게도 난 그런 오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주저앉아 통곡 했었다.

오빠는 괜찮으실 거라는 말 외에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기에
80년도 당시 레지던트던 현재 강진 최고의 병원 원장이신

남동생의 악성 뇌종양 수술에 참관했던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어쩜 두 손 모두 그리 떨리는지 수첩조차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결국 보다못한  그가 걸어주고 난, 빨리 아버지의 현 상황에 대해서 알아봐달라는 말만 겨우 했다.
15분이 채 되지 않아 아버님 임종 준비해서 빨리 나오라는 친구의 답이 왔고
고약하게.. 정말 고약하게. 의사들은 어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생명 논하는 말을

그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냐며...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울음의 의미는 오빠로부터의 전화를 받으며 무언지 모를 불안에
가슴 내려앉던 실체를 확인한 절망 같은 거였다.

 

바로 일리노이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샀고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옷 두어 벌 가방에 쑤셔 넣으며 여권만 들고는 공항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한 채

누가 보던말던 비행기 안에서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빠 딸이 지금 한국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버텨 달라며 주문 외우 듯 중얼거리며

비행기 안에서도 한국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듯 떨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에게
그 누구도 심지어 스튜어디스도 묻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아빠, 저에요.”

누워계시는 아버지 귀에 속삭이는 내 말을 듣고는 계셔도,

당신은 이미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평온을 즐기시는 듯 했다.

그렇게 며칠 후,

잘 가시라는 엄니 인사에 아버지의 눈꼬리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세상 생명의 신비에 대해 인간이 알 수 있는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 겠는가 싶었던,

그것이 뇌사 상태이시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무튼 당신께서는, 손수 샤워도 하시고 휴가 가듯 무더운 여름에 떠나셨기에

사람들은 모두들 평소 성품 그대로 복 받으신 분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점은,

한국에 도착해 병실에 들어가 아버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일어난 나의 변화였다.

울고 계신 엄니를 보자, 오는 동안 내내 흐르던 눈물이

눈물샘이 막히기라도 한듯 한순간에 닫혀 버리는 거였다.

악성 뇌종양 수술로 건강이 좋지 않던 동생 대신

내가 오빠와 함께 아버지의 입관을 맡았다.

 

葬地를 다녀와 다시 미국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게서는 눈물 한 방울도 흐르거나 고인 적도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엄니 앞에서 울지 말기를 당부라도 하신 듯

아무튼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난,

다른 사람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은 딸이었다.

 

그리고 오하이오 주의 씬씨내티로 돌아온 후

장을 보러 차를 몰고 처음 거리로 나갔던 날,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난,

가슴 깊은 바닥으로 부터 해일 밀려오듯 눈물이 넘쳐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울고 싶을 적엔 눈물샘이 마르기라도 한 듯 나오질 않더니

대로 한가운데 차를 멈춘 채 모든 차들이 혼을 울리다 비켜 가도록,

마치 이 세상이 온통 귀 밖으로 밀려나가고 사라져 혼자 남게 되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되도록 허락 받은 듯
막무가내로 흐르는 눈물, 비로소 터진 울음을 한동안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매해 아버지 기일이면 어떤 해는 재미있던 일, 행복하던 일,

딸 하나 더 엄격하게 가르치시려 별걸 가지고도 다 혼내시던 기억 등
조금 쓸쓸하긴 해도 참 많은 일들이 미소 짓게 하는 추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이번 미국으로 오기 전 산에 아버지를 뵈러 가서는

요즘 나만의 속 이야기도 드리며 아버지에게 실제처럼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기일이 다가오자 유독 그날 마지막 이름을 불러주신 수화기 속 아버지 음성이 들리는 듯 해,
가슴이 저리다.

이상하게 또다시 그 신호등 앞에서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