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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렘이 이끄는 생 (詩와수필)/Like a story

(5) 고베 지진 수기/ 나, 살아있어요!

by HJC 2010. 4. 4.

 

 

 

(5) 나, 살아있어요!
 

오후 3시쯤, 누군가가 집엘 다녀왔다고 했다.

밤에 전부 이곳에서 자야할 텐데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좀 챙겨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모두는 자신들도 다녀와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무너지면 삽시간에 쓰레기가 되고 말 것이기에

누군가는 집에 가서 현금과 결혼반지만이라도 챙겨 와야겠다며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얼른 다녀오자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먹은 거라곤 고작 빵과 작은 우유 한 개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걸 먹고 30층 빌딩을 계단을 오르다간 먼저 허기로 사망하겠다고

긴장으로 팽대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 누군가가 농담을 했지만,

32층의 고층 빌딩을 엘리베이터 없이 올라갔다 오는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비단 힘이 들어서 뿐 아닌, 빌딩을 오르내리는 동안 또다시 강진이 와 무너지게 된다면

실컷 빠져나왔다가 제 발로 들어가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럴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거였다.

 

그런 가운데 용감하고 재빠르게 가장 먼저 다시 집엘 다녀온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집에 있는 먹을 것과 담요 등을 가져와야겠다며 웅성대는 곳도

우리가 모여 앉은 한국인 테이블로 부터였다. 

나 역시 그렇게 하며 마치 종일, 들에 일이라도 나가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일어섰다.

가면서도 아이들만 두고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생각 같은 것 하지 않으려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가져올까만을 생각하려 애썼다. 

가족 수대로 슬리핑 백 4개와 작은 담요 등을 준비한 후

밥통에 있던 밥을 전부 플라스틱 사각 통에 옮겨 담고

물기 없는 반찬 몇 가지를 넣어 부리나케 학교로 돌아왔다.

이고지고 들어오는 우리를 발견한 의기소침해 앉아만 있던 다른 나라사람들도

어두워지기 전에 준비 해놓지 않고는 밤을 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제야  한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거의 앉은 자세로 자는 둥 마는 둥 날이 밝기만 기다리던 우리들에게 다가온 다음날 아침은

계속 여진이 있음에도 어제에 비하면 폭음도 없이 맑고 고요하게 느껴졌다.

 

15층의 살던 집이었다면 고베도 오사카 쪽도 전부 보였을 것을

눈앞의 것 밖에 볼 수 없어 답답했던 나는 밖으로 나와 섬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면서도 대피한다고 밖에 나와 있다가 얼어 죽을 순 없는 문제라

하는 수없이 다시 자신들의 아파트로 들어가 밤을 보내던 일본인들이,  

섬 가운데로 흐르게 만들어진 수영장 같은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던 수로에서

지진 때 길 위로 넘쳐나고 조금 밖에 남지 않은 물을 집으로 퍼 나르고 있었다.

전기도 물도 없었기에 바닷물일 그 물을 당장은 씻거나 화장실 물 내리는 용도로 사용하겠지만,

하루면 그것도 바닥이 드러날 것이뻔했다.

외국인이 많다보니 조금도 일본 같지 않게 지어진 건물과 환경 등 

마치 다른 나라인 듯 꾸며진 이 로코 아일랜드로

주말이면 다른 곳에 사는 일본인들은 관광 삼아 놀러오곤 했었다.

외국인들은 내가 일본으로 가기 전만 해도

한큐 미카게 시나 아시야라는 시 등에 많이 모여 살았었으나,

이 섬이 만들어진 후에는 골프장, 실내 휘트니스, 국제 규격 수영장 등 

모든 편리를 갖춘 만션이 외국에서 파견 나온 가족들을 겨냥해 지어졌고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일본을 즐기고 볼 수 있으면서도

일본이 아닌 듯 느껴지는 이 섬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은 일본 간사이 지역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이에 수퍼에도 기본 영어는 할 줄 아는 직원들이 있고

만션 프론트 데스크에도 영어를 하는 직원들만 채용하기에

섬 안에서는 일어를 할 줄 몰라도 불편함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7시 좀 넘었을 뿐인데 섬 한가운데에 외국인들이 한 줄로 길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까지도 지나다니면서도 예쁜 새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보통 공중전화인 줄만 알았는데,

로코섬 안에서 유일한 인터내셔널 공중전화라고 했다.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내가 그런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나 눈이 번쩍 뜨이게 기뻤다. 

그렇다곤 해도 누가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지금까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머지 세 대는 끊겼는데 아직 연결 된다는 것이 고맙고 신기했다.

지금은 미국인과 아시아인이 증가했겠지만 그 당시 섬의 외국인 분포는 유럽이 60%,

미국이 30%고 나머지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그만큼 국제 전화를 거는 그들의 언어 또한 각각 이었다.

해도 그런 언어와는 무관하게 사실 그 이상 통화를 길게 그는 것은,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 할 다른 이들의 간절한 시선 때문에라도 가능하지 않았다.

몇 십 명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통화는 한 사람에게 오직  20초에서 30초 정도만 허락되었다.   

 

 

나, 살아있어요! 

 

 

알아듣는 몇 나라의 말은 모두 그 의미로, 같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고 할 것 없이 그 말 한 마디만큼 정해진 시간에

짧고 함축성 있게 현 상황을 전달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말했고, 아버지 돌아가신지 불과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았었기에

일본 지진 소식에 더 놀라고 더 절망하고 있을 가족에게 나의 그 한 마디 안부가 얼마나 큰 의미일지 몰랐다.

첫 마디로 그 말을 하며 환호하는 수화기 저편 가족들의 음성과 함께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해서 몇 시간 후나 내일도 살아 있을 수 있다고는 장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 아.직. 살아있어요! 라고는 하지 않았다.

당장 아침으로도 먹을 음식이 없어 인스턴트 식품 등 다른 먹을 것을 찾아

다시 만션에 올라가 야 할 위험을 무릅써야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지는 크르릉 쉬지 않으며 무엇인가 다음 준비를 하듯 위협하는데,

저 멀리, 불빛 대신 밤새 도시를 태우고도 남은 불씨가 아직 남아있는 본토가 보였다.

밤새 아비규환 지옥 같았을 몇 킬로도 더 될 바다 건너 보이는 고베 지역 전체가

마치 진회색 크레파스로 칠해 놓은 듯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 것이 보였다.

로코 라이너와 로코 라이너도 끊기거나 위험해 막아놓은 상황에

무슨 수로 이 섬을 빠져 나갈 수 있겠는가.

슬픔도 포기도 아닌, 착잡함이 일었다.

살아있긴 한데, 아직 살아있긴 한데…….  

 

 

 

계속... ...
 
 
  

1.Albatrosz ( Chopin ) 2.Siciliano (J. S. Bach : temaj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