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 전기가 끊어졌음을 알면서도 방마다 다니며 마치 생각 없는 사람처럼 스위치를 켜 보고
라디오를 켰다 껐다 하며 황당해 하는 자신에게 손잡으며 사정 하듯
그만 진정하자며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조금씩 날이 밝았다.
그러다 불쑥 빛 들어 선 듯 실내가 환해지자
마치 괴물이 집단으로 쳐들어와 집 안의 모든 것을 부수고 간 듯 어지러진 실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응접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들이 모두 떨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엎어진 채 유리만 깨졌고 어떤 것은 옆으로 날아간 듯 프레임도 금이 가거나 부러진 채였다.
200여장의 CD를 꽂아두었던 CD Tower는 몇 바퀴고 저 혼자 회전을 한 듯
꽂혀있던 CD케이스에서 알맹이만 빠져나와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덜어지고 날카롭게 깨져 있었다.
기막힌 상황이 어디 그것뿐이었겠는가 만은, 우선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대낮이었다면 목 언저리가 서늘해질 만큼 살인 무기로도 손색이 없었겠다 는 생각이 들자 둘러보기도 겁이 낫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좀 내려다 봐봐, 길에 사람들 다니는가…….
아냐, 가지마! 발코니로는 근처도 가지마!
.
순간 지진으로 그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간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치던 내가 외쳤다.
문짝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또 다시 지진이 발생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일어라고는 모시 모시 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당시 우리의 언어력이란,
일어 선생에게 배운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를 읽을 줄 아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기에 긴박한 상황에 대처할 순발력도 없는 난, 어찌 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찬찬히 실내를 돌아볼수록 속속들이 그 피해가 점점 더 보이기 시작 했다.
다이닝 룸 식탁 가까이 있던 천장까지 닿던 한 면이 유리로 된 그릇장은
앞으로 코 박고 넘어진 듯 엎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와인 잔이나 주스 잔 등 유리 제품들은 전부 깨져 함께 섞여있었다.
들여다 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온전한 것은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목젖이 달라붙은 한 듯 갈증이 일어 물을 마시려는데
좁지도 않은 부엌 바닥은 깨진 그릇들로 덮여 발을 디딜 수 조차 없었다.
부엌 선반장의 문들도 전부 활짝 열린 채였는데
선반에 놓여있던 그릇들은 마치 이사 나간 집처럼 비어있었다.
사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사 간다고 마련했던 몇 종류의 그릇 세트들도 그때 모두 깨져버렸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난, 낱개가 재미있고 보기 좋으며
낱개가 개성 있고 낱개라야 이름 붙이기 좋다는 주장으로 그릇 세트를 새롭게 장만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떨어진 위 또 떨어지고 깨진 그릇 위 또 깨진 모양새는 마치 부엌 가구를 배치한 이가
지진이 일어나면 떨어질 그릇들이 모일 곳을 미리 계산 해 설계라도 한듯,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도 아닌데 어떻게 한 곳으로 덤비 듯 떨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때 난, 보지 않고는 그 누구도 믿기 어려운 일로, 난 분명히 허공에도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것보다도 아까웠던 것은 오래 전 오리건 대학 미술실에서 만들었던
애들 장난감과 찻잔, 밥공기, 머그, 접시 등…….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두 상자 분량의 내 소중힌 세러믹 작품들이었다.
어떻게 그릇들이 전부 싱크대 설거지 통으로 집중적으로 날아간 것인지,
몇 번이고 확인해도 다시 전기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여지저기 뒤져 라디오에 전지를 찾아 넣었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일본어, 혹 다른 지역 방송이라도 나오려나 싶어 귀 기울여 보아도
지구상에 우리만이 살아있는 듯 세상은 불통이었다.
히터가 돌지 않는 1월의 실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고
너무 놀라고 울다 지친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먹여야 겠기에
이것저것 한 쪽으로 밀어놓고서야 겨우 냉장고 문을 열 수 있었다.
참 무모하다 싶게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로
피넛 버터와 잼 바른 토스트를 나눠주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이었다.
쾅쾅쾅쾅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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