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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렘이 이끄는 생 (詩와수필)/Like a story

(7) 여권을 가져오라고? / 일본 고베 지진 수기

by HJC 2010. 4. 6.

 

 

그 발표 내용은- 기다려도 로코 아일랜드까지 도움의 손길이 오긴 오되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기에,

미국 본사 쪽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직접 배를 보냈다는 것이었고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도착할 거라는 거였다. 

 

Thank God~! 

그 발표가 떨어지는 순간 강당 안은 한동안 환호와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운동장에서 서성이던 주민인 일본인들을 통해 그 소식이 섬 전체로 퍼지자,

그들 중 병원 등 특별한 이유로 섬을 나가야만 할 일본인들 중

같이 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도 생겼다.그 청을 들은 미국 회사 측에서는 몇 분의 회의 만에

다시 자리가 되는 한 누구든 승선시켜주겠다는 발표가 났다.

도움의 손길을 못 받고 있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고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누군 구출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며,

배를 두 번 오고가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는 이들은 모두 오사카로 대피 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우리 가족이 속해 있던 미국 회사의 넉넉한 사랑의 약속에, 감사의 뜻으로 큰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각기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 당 꼭 필요한 물건만을 챙긴 작은 가방 한 개 씩과

일본을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개인의 여권만을 챙겨 다시 학교로 모였다.

그날 저녁식사는 모두 첫날 첫 식사만큼 하지 못했고

되도록이면 화장실 가지 않으려 소량의 식사에 물도 마시지 않았다.

배고프고 자리가 불편해서만은 아닌데, 잠도 오지 않았다.

심신이 지친 까닭도 있었겠으나 수백 번의 여진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면 알수록

앞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 먹은 전 날과 내일이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먹지 않고 참는 경계의 밤은, 참으로 지루했다. 

처음 닥쳤던 강진 후 학교에 대피해 있는 동안에도 4도 이하는 수백 번, 4, 5 도 이상 되는 지진은 수백 번 계속 되고 있었다.

물마시다, 음식을 먹다, 얘기하다,  잠을 자다가도, 수도 없이 멈추거나 벌떡 일어나 앉거나 옆 사람을 마주 붙잡으며,

정말이지 2, 3분 간격으로 흔들라는 섬을 두려운 마음과 몸으로 받아내며 지냈던 지진 50시간을 넘기고

드디어 새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지루한 오전이 지나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때우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창밖을 내다보러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뭔가 싶어 다가가보니,  운동장 한가운데로 헬리콥터가 내리고 있었다.

독일의  N 회사 대표를 구하러 온 헬리콥터는 그의 가족과 기사를 태우고

기다림에 지쳐가는 모든 사람들을 두고 허공에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 갔다.

그리고 오후 2 시 경엔 아주 근사해 보이는 소형 배가 도착해

또 다른 유럽 회사 대표의 가족을 태우고 떠나갔다고 했다. 

아무리 하루, 이틀 지옥이었고 사흘째 희망을 보게는 되었다고 해도,

우리를 구하기 위한 배가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무슨 이유로든 절박하던 사람들이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고만 있었겠는가 싶지만,

그렇지 않던 우리도 그들이 떠난 후에야 그 어떤 일도 100% 보장은 없다는 것이 현실화 되고

배를 타야만 마침내 이 섬을, 고베를 탈출 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급격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으로 오후 늦게라지만 기다리던 배가 도착 했다

하지만 흔하게 말 하듯 고통스러워 기억하기 싫었던 상황도 아니건만,

배의 크기나 모양, 내부, 그 어떤 것도 기억에 없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너무도 긴박한 상황을 지내고  배에 타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걸까,

타지 않고 탔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는 듯,

아무리 날이 어두웠었다고 또 그날 이후 정말 그 배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뇌리에서 까맣게 지워질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나중에 들으니 배는 한 번 더 왕복해 섬에 살던 원하는 주민들 모두를 오사카로 실어 날랐다고 했다.

쾌속 전철과 로코 라이너를 이용해 40분이면 갈 수 있는 오사카를 대지진 후 바다로 해서

섬을 빠져나오기까지 사흘이나 걸린 셈이지만 이런 감지덕지할 일은 없는 거였다.

아무튼, 우린 저녁 해가 뉘엿거리다 넘어갈 즈음 오사카 항구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우리 회사 직원 가족들만 남기곤 모두 제 갈 곳을 찾아 흩어져 갔다.

약 200 명 정도 되던 미국에서 나간 주재원 가족인 우리 모두는

바로 하이야트 호텔 투숙을 위해 우송(?)되어 갔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그동안 고생했다는 회사 대표의 간단한 격려 인사를 듣고 

뷔페식당으로 안내 되었다.

오랜만에 정신없이 먹고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니,

그제야 만션의 부서지고 깨져 어지럽게 흩어진 모습이 떠오르고

일본으로 온지 한 달여 만에 당한

지진 때문에 덧정 없어진 일본에서 살아가야 할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직원 가족들은 모두 함께 홍콩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래봤자 옷도 없고 맥도널드나 사먹어가며 호텔에서 빈둥거린 것이 고작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일주일 후 우리는 다시 미국 본사로 보내졌고

회사의 배려로 임시 거주지 등 모든 것은 점차 정상화 되어 갔다.

 

 

다시 일본으로! 오사카에서 일본을 떠난 1월 22일,

그 후 두 달 반 만인 4월 중순 잠시 한국을 방문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니

섬 안에는 예전에 없던 버스 노선이 생겨 있었다.

버스라고는 간사이공항에서 쉐라톤 호텔로 들어오는 직행 셔틀 버스 밖에 허락하지 않던 곳인데

로코 라이너 무인 전철이 운행 하지 못 하게 되었으니,

대신 고베 본토로 들어가는 버스노선이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다.

불바다가 되어 버렸던 바로 그 수미요시로 향하는 단선 버스였다. 

허나 고베 시내로 들어가려면 그곳 보다 한 정거장 더 서쪽에 위치한

이번 지진으로 가장 많이 부서지고 제일교포가 많이 살던 로코미치라는 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만 가능했다.

산노미야와 고베 차이나타운이 있는 모토마치,그리고 고베의 중심인 하버 랜드로 가기에는 좀 불편 했지만

그 난리를 겪고도 무엇인가 교통수단이 생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만을 토로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진 발생 석 달이 지났지만 뉴스에서는 아직 무너진 건물 더미를 치우고

완전하게 허무는 과정에서 생겨나게 된 먼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체에 해로운 가스가 기준치 이상 공중에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외출 시 꼭 특수 마스크 착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래 거리로 나서면 더운 여름이 지나도록 두 눈만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가슴 아픈 일로는 그날 이후 거리를 다니다보면 정신을 놓은 채

거리를 횡설수설하며 활보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아이 부모 등 사랑하는 이를 잃은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가슴 아픈 이들이었다. 

교통사고든 병사든 어떤 이유에서든 일본에서는 사람 죽은 장소에 작은 꽃다발을 가져다 놓곤 하는데,

그 후 내가 살던 동안에도 거리 곳곳 여기저기 놓인 꽃다발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기억하는 한, 매해 1월 17일이면 그러할 것이다.

만션에서 바라보면 섬과 육지를 잇는 무인 기차 로코라이너의 운행이 내려다 보였는데

6월 어느 날 부턴가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은 그 정확성과 안전성을 체크하기 위해

새벽 6시면 철커덕철커덕 움직이기 시작해 한밤까지

무려 6개월이 넘도록 시험운행만을 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일본을 생각했다.

 

섬 안에만 있다가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바로 일본을 떠났었고

지진의 잔재가 거의 정리될 무렵 다시 돌아간 것이기에

이렇게 담담하게 글을 적으면서도 그 처절했던 죽음의 참상을 피할 수 있었음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하게 된다.

 

 

 

rokko liner.jpg


 로코 라이너 

 

 

 

 

 

 

 

 

 

 

끝.

 

 

 

 

 

 

 

지금까지 진도 7.3에 5천 5백 여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고
행방불명까지 합치면 훨씬 그 숫자가 늘어났을 인명 피해와 1천 400억 달러의 재산 피해를 낸,

 

사진 찍어둔 것도 그날의 느낌을 적은 몇 자의 기록도 남겨둔 것 없어서
13년이 지난 일을 기록 없이 기억에만 의존한 채 직접 겪었던 고베 한신 대 지진에 대해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