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인들 중에 아들이 있는 엄마들은 어디를 가도 젊은 청년들과 말을 잘 섞던데,
딸이 있는 나는, 꼭 내 쪽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젊은 여성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되는 편인 듯 합니다.
나와 같은 방의 젊은 여성 중 한 명은 엊저녁 맥주 한 캔 들고 앉아 나눈 이야기 속에서 직업이 수학선생님이라는데,
벌 때 벌고 1,2개월 여행하다 돌아가 또 필요한 돈을 번다고 하는 것 보면 능력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내가 중 2 때 한국에 수학 정석을 펴 낸 선생님에게서 과외를 했다는 말에, 어마어마하게 비싼 선생님이고
아무나 가르치시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신 분인데, 나보고 최소 전교 1,2등은 하는 우등생이셨겠다며 눈을 휘둥그레 뜹니다.
어째 이야기가 그렇게?...그런 저런 것 다 아니고요, 그저 그 선생님 딸이 같은 학교였고 어쩌다 보니 엮였던 거에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저 좀 유명한 수학 과외 선생님이셨을 뿐이라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30 대 중반의 깡 마른 체구의 선생님은, 아인슈타인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기실 수학은 이과가 아닌 문과며
동시에 Art 라 한 말을 인용한 내 말에, 맥주 한 캔을 더 따며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렇군요.
우리는 둘 다 수학을 좋아한 여학생이었군요.
또 한 여성은 새벽 4시 반에 일출을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제주항으로 나섰다가 돌아와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들고 부엌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더니,
금세 아래층에 내려가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가져와 건네줍니다.
잉글리쉬 머핀에 치즈와 달걀을 얹어 집에서 보다 더 제대로 된 아침을 만들어 먹으며 듣는 얘기 속에서,
난 그녀가 제주도민이 다 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녀는 이 숙소에 열 번도 더 머물렀으며, 한 번 오면 한 숙소에 적어도 일주일 씩은 머문다고 합니다.
길도 한 번 가면 같은 장소를 가고 돌게 되더라도 다른 길을 이용 하려하는 나와는 다릅니다.
좋은 온천 다 두고 할머님들 수다로 북적이는 동네 대중탕으로 샤워를 하러 가고,
깨끗하고 화려한 곳 보다는 오자마자 주르르 설명하고는 사라져 다음 날 숙소를 나올 때까지 보이지 않던 쥔장의 처세 등
무언가 공통점이 있는 듯 이래저래 시설 면에서는 좀 떨어지긴 해도 마음이 편해 좋더라는 말을 들으며,
아마 그녀는 마음이 따뜻하고 여유로우며 누구와도 친해질 수는 있지만 외로움도 잘 타는 편이라
그것을 풀기 위해 자신이 익숙해질 수 있는 곳을 찾아든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독립적이기도 해 역마살이 동할 때마다 새 사람이 있는 새 길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올 가을 스페인 배낭 할 계획이라 해서 스페인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해준 후 짐을 챙겨 서귀포를 향해 일어섭니다.
배낭여행은, 몸 편하게 하면 반대로 그 여행의 질이 떨어지는 거(?)라는 나만의 논리를 지키기 위해, 차를 렌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주를 떠날 때까지 절대 택시도 타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까짓 콩만한 섬에서도 자신을 이겨내지 못해 택시를 탄다면, 어디로 간들 이겨내겠는가 싶어서 입니다.
다만,
내 어깨가 카메라 가방의 무게를
내 두 팔이 삼각대와 작지만 가볍진 않은 옷가방의 무게를 지탱해 주기를,
내 두 무릎이 한라산 영실에서 내려올 때처럼 삐걱대 고생 시키지 않기 만을 바랍니다.
차가 다닐 리 없는 시각.
새벽에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 2,30 분 걸어 나가면 다다를 제주항으로 향합니다.
저녁 무렵까지 비 내리던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맑을 것이라 했지만
새벽 하늘은 한껏 흐려 찍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혼자라는 사실은 언제나 처럼 마음을 벅차게 하고,
입술 잘 움직일 수 없게 하던 따가움도 그 덕인지 좀 나아진듯 합니다.
새벽 다섯 시가 되자 하늘이 푸르게 밝아오기 시작하고,
어두울 때 담은 잔잔한 바다 위에서 작게 흔들리던 정박 된 보트의 항구 풍경 몇 장 들고 일어납니다
카메라 가방 말고는 다른 짐도 없는데
햇살 없는 새벽, 숙소를 찾아 돌아갈 거리를 생각하니 좀 아득합니다.
튼튼하자. 강하자.
어디로든 다시 떠날 수 있게.
서귀포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100번 버스에 올라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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