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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렘이 이끄는 생 (詩와수필)/Like everyday life 1

피자 맛, 통닭 맛.

by HJC 2010. 5. 26.

 

 


       
 



피자 맛 통닭 맛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 한 친구를 기억해 낸다.
1970년 대 그 당시 한국은 이곳 미국처럼
뚱뚱하다 소릴 들을 정도로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 드물던 시기.
보기에  조금만 뚱뚱해 보여도 참 사람들은 참견도 할 말도 많아
길을 지나다가도 뒤돌아보며 수근덕거리던 시잘이었다.
 
상당히 몸무게가 나가는 편이었던  만나고 싶은 친구, 김미성.

친구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남과는 다른 독특한 사춘기를 보내느라 그 시기 이후 만난 적 없지만
그애의 부모님은 두 분다 의사 선생님으로 30년도 더 된 그 당시,
오지인 아프리카에서 봉사를 하고 계신다고 했고
그래서 자기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고  했다.
 
늘 명랑하고 재치가 많은 탓에 학우 모두를 즐겁게 해
처음엔 뚱뚱하다고 놀리던 애들도 따르도록  만드는,
사람 끄는 재주도 가지고 있던 친구.

내 기억에 그 친구는 천부적이라 할 만큼
보면 보이는 대로 망서림없이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표현 중에도 음영 처리에 뛰어났었다고 기억한다.
어디에서든 그와 연관된 일을 하며 산다는 소식 듣게되면
그럴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었다.

아무튼 그런 그 애와 나는
홀쭉이와 뚱뚱이란 소리를 들으며
단짝처럼 중학교 1, 2학년을 붙어다니다시피 했다.
어느 누구한데도 들키지 않았지만 내게만은 외롭다는 소리도 했고,
누구든 한 번 쯤 자살을 생각해보는 사춘기로
죽고싶다는 말도 가끔 했었다.

그애와 비밀스럽게 대화를 하던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겠지만,
오직 내 앞에서는 눈물을 자주 보이던 친구.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할 수없이 부모님이 미성일 아프리카로  데려 가셨을까.
 
실제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성적은 꼴찌 부근이었던 미성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은,
갑자기 바뀌었던 연합고사라는 고등학교 들어가는
기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떨어지기도 쉽지 않던  그 시험을
자신이 없어 치루지 않은 것이 아닌,
부족한 것 없이 돌봐주시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도
말도 못하게 부모님의 정을 그리워하던 친구가 선택한
부모로 부터의 연락을 받을 수 있을 확실한 방법이었던 듯 하다.
 
어디, 누구는 그러하지 않았겠는가만은....
 하지만 그래도 그냥 재수를 해 다시 고등학교를 가고
그저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지..
돌이켜보면 그 애에 대한 그런저런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애를 좋아해서 무슨 말이든 그냥  믿었었다,

어쨌든 그런 그 애와 내가 잘 가던 장소가 한 곳 있었다.
그곳은 바로 충무로에 있던 명동 통닭집으로,
30여 년을 훨 더 거슬러 올라간 중 2 때
그런 곳엘 드나드는 학생은 우리 둘 뿐이었고,
그 덕에 아무에게서도 애들은 가라- ..소리는 커녕 
오히려 특별대우처럼 더 친절하게 대해줬던 걸로 기억한다.
간혹 유명한 모델들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그러나 사춘기 소녀였던 내가 단 한 번도 그들의 세계를
부러워 한 적 없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한편 늘 몸무게를 조절을 해야 할 그들이
왜 미성이와 내가 잘 가는 그 통닭집을 드나들었는가가 의문스럽지만,
아마 그 당시는 사보이 호텔 등 만날남의 장소가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러던 우리 역시,
미아리 저 넘어 있는 학교 앞에서부터 택시로 명동을 나갔다.
하지만 통닭을 먹는 일 외엔 둘러 본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아무튼 그애를 생각하면
빛 스쳐지나듯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손톱 검사에 걸리지 않고 용케 길게 유지하고 있던
그애의 긴 새끼 손톱에 관한 거였다.

그애가 제일 좋아하던 통닭과 함께 나온 무우 깍두기를
언제나 그 긴 손톱을 가진 새끼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거였다.
새끼 손가락..아니 그 긴 손톱과 엄지를 사용해 먹는 모습은,
그 당시 기타를 배우느라 손톱을 짧게 깎았던 나는
그 애의 손재주 만큼이나 긴 손톱을 부러워 했었다.
한 번은 부러우면서도 불편하지 않느냐며 물어본 내 말에
그애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새끼 손톱은 내 꿈이거든. 이렇게 길러야 엄마 꿈이 더 잘 꿔져."
 
난 그 말에 까르르 웃으며 니가 애냐.... 비웃었는데
내 말을 들은 친구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거였다.
많이도 섭섭했는가 유난히 킄눈의 눈 주위가 붉어지며
눈물을 훔치는 거였다.
당황한 난,  그런 그애를 못 본 척
한동안 허겁지겁 수다를 떨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헤어져서는 만난 적 없다는 부모님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는 바로 얼마 전에도 만난 듯 하고, 
전화로 무슨 이야기 했는가를 묻지도 않는데
통화한 내용을 흥분한 음성으로 말해주며는 것을 들으며
난 그 애의 커다란 체구가
왠지 바람 앞 문풍지처럼 위태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대학 노트 한 권을 사흘 정도면
빽빽히 다 메꾸곤 하던 시절.
그런 나와는 다르게 그애는 작고 큰 그림으로 
작은 스케치북을 가득 채웠었다.

우리가 그리고 적은 것을 바꿔보던
통닭집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장소였다. 
닭을 뜯어먹은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먹은 뒤 다시 티슈로 닦아가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모습으로
우리 만의 세계를 즐겼었다.

근 1 년동안 적어도 한 달에 두어 번 씩은 갔던 명동 통닭집은
중 3 때 겪게 된 많은 변화로
사귀던 친구들로부터 혼자 떨어져 나오기 전까지 잘다니던
학창시절의 잊을수 없는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내게있어 통닭 맛이란,
꼭 통닭이 아니어도 앉아있는 장소의 분위기나
붉고 어스름한 조명 혹은 테이블 위에 놓인 소금,
후추통의 모양새 그리고 그 당시를 기억하게 하는 어떤 색이든
그곳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전부,
다시 한 번  그때를 상기시키고
그애와의 시간을 추억하게 한다는 각도에서 
통닭 맛이 난다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Picture%20084.jpg               
   


"통닭 맛 같아."

그날도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앞에놓고 앉아 먹기 전, 
혼잣말로 피자에 얹혀진 치즈를
통닭 맛이 날 것 같다고 말하는 엄마를 바라보던 둘째는
엄마가 35년의 긴 세월을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단 번에 거슬러 올라가
중 2 소녀가 되었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Whatever you say.... 
 
이번엔 무엇을 가지고 그러는지 알 수없어도
엄마의 엉뚱한 면은 익히 알고도 남는다는 듯,
통닭 맛이라니.....그저 고개만 가로저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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