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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렘이 이끄는 생 (詩와수필)/Like everyday life 1

아직 한창 사춘기였던,

by HJC 2010. 4. 26.

 

 

 

 

 

 

 

아직 한창 사춘기였던        華雨

 

 

 

 

지루함으로 아마……. 거의 끝까지 읽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자신이 지내고 있는 방을 어지르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가장 즐겨하던 시기는, 그것이 습관이 아닌

어떤 비정서적 발상을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사춘기가 지났다고 여기던 고교 2학년 대의 이야기다.

학원이라는 곳도 딱 한 번 허락 받아 다니던 고 3 ,

새벽 다섯 시에 집을 나서야 했던 국사과목을 듣고 바삐 등교 한 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종로, 청계천, 을지로의 길 순서를 잘 몰랐다면

아무리 엄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라도 어이없어 하겠지만, 사실이었다

게다가 왜 하필 한가지의 과외과목이 국사냐며 의문이 들겠지만

그건…….사실, 내가 암기라는 것을 치명적이라 부를 만큼 싫어했기에

제일 점수가 나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은 그 어떤 것도 외우지 못해서는 아니었을,

외워서 시험을 봐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싫었던 것에서 비롯된

반항적 자기최면의 결과이지 아니엇을까 생각해 본다.

암기가 필요한 과목인 줄 알면서 시험 보는 날까지 책 한 번 들추지 않으니,

그만, 요행도 비켜가는 것이 당연한 거고

그러니 단 한 개도 정답을 모르던 난, 쉽게, 늘 거의, 꼴찌이었을 거다.

하지만 어떤 과목은 운 좋게 전교 1등을 하기도 했는데

좀처럼 공부라는 것을 하지 않던 내겐,

그래서 공부해도 꼴찌였던 것과 안 해도 1등 하는 걸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꼭 공부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졸업을 한 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주 가끔 시험을 봐야 하고 다들 죽어라 공부하는데 나만 교과서가 없는 꿈을 꾼다.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꿈에서라도 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그래서인지 마음과는 달리 하고 싶어도 책이 없는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당시는 부러 책을 넣지 않고 학교엘 간 건데

현실 속 꿈엔 책을 갖고 싶지만 없는 것으로 나온다는 연관성에 관한 점이다.

마치 임신해 입덧하는 여자가 먹고 싶어지는 것은

임신 전 제일 잘 먹지 않던 종류의 음식인 것처럼,

하교할 때 갈아타곤 하던 205번 버스에 매달리듯 바로 집에 돌아오면

곧장 2층 내 방으로 올라가 다시 학교가 아닌 집에 틀어박히곤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난 그런 나의 행동을 더 큰 대지로 스며드는 거라고 정의 했고. 

마법처럼 안락한 나만의 장소인 그곳에 천국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선 하나만 그어도 95점의 미술 최고점수를 주셨던 선생님.

국전 대상을 받으셨던 그 선생님께서

왜 그랬는지 난 아직도 그분의 나에 대한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마 수업시간만큼은 눈 총총 선생님의 어떤 말씀도 제일 열심히 들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선생님 자체가 좀 다르기도 하셨다.

수업시간 시작이 한참 지나도 나타나질 않으셔서 미술실로 찾아 가면

대부분의 경우 깊은 잠에 빠져 계시곤 했다는데.

국전 대상을 받으셨던 조각이 전공이시던 미술 선생님은

15일 동안 감지 않은 머릴 주제 삼아 공간과 라면 발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대해

1시간 내내 알아듣지도 못할 강의하기도 했다.

끝나는 종이 울려 나가실 때 지루해 졸고 있던 아이들이 곧바로 책상에 엎어져 잠에 빠져드는 걸 보자 

미술 시간에 기본 물감도 준비해오지 않은 멍청이들이에게

더는 미술을 가르칠 수 없다고 소릴 지르셨는데

그때도 지금도 난, 그 선생님의 괴팍한 관념을 이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무서웠던 선생님이 미술 대학에 가기를 권했어도

어머니의 예체능계 진학 반대 의사가 심하기도 했고 아무튼 그런저런 상황을 보며 

섣불리 미대 진학을 결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방 이야기로 돌아가,

일단 2층 내방에 올라가 가방을 던지고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방문을 눌러 잠그곤 했다.

누런 연습장에 이렇게 저렇게, 혹은 굵게 더 굵게, 죽죽 선 그은 종이들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 놓거나.

세상의 모든 직각이라는 것에 싫증이 나는 날이면

갱지 연습장을 한 장 씩 뜯어 그 귀퉁이를 찢거나 바닥에 내려놓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구겨

그것을 거꾸로, 혹은 바로 늘어놓거나, 떨어뜨려 내려앉는 그 상태로 두기도 했다.

그러며, 그렇게 내려앉은 모습이라는 것에서 벗어난,

한 장소에서 움직일 수는 없음에도 매어있지 않은 정신이라는 것은

자유스러운 자연스러움과 같은 형태일 수도 있다는 것에 위안 받았던 것 같다.

그뿐 아닌, 서랍 속의 모든 물건들은 방바닥으로 이사도 시켰고

딱히 예쁠 필요 없이 아주 오래된 낡은 종이라든지 얼굴처럼 생긴 돌,  인형이라 부르는 나뭇가지,

도화지로 오려 만든 어떤 모양 둥그런 모든 것들이 내게는 어떤 값나가는 물건보다도 특별했다.

예쁘기만 한 인형이나 예쁜 짐승이 예뻐 보이지 않은,

촌스럽다며 고개도 돌리지 않던 곳이 친구들 자주 드나들던 선물의 집 같은 곳이었으며

인형은 맹해야 인형이고 집짐승은 꾀부릴 줄 몰라야 예쁜 거라고 보이던

무엇이든 조화롭게 상품화된 아름다움 같은 것에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벽엔 뭐가 있었더라.

아무리 시답지 못한 백일장이라고 박힌 종이 아니 상장이라도

모두 그런 상장 한 장쯤은 훗날까지 보관할 줄 알아야 했다고 하겠지만,

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공부도 별로 한 기억 없는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어찌된 게 지금은 그런 것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언제 것이든 앨범 한 권도 남아있지 않은,

유치원부터 17년을 학교에 다니고도 앨범 한 권이 없다는 것이 이해되는가 말이다.

정말 웃기는 일 아닐 수 없지만 공부는 담 쌓았었다고 해도 앨범은 다르고

세상 살며 최소한 그거,  졸업 앨범쯤은 있어야 하는 건데....

미국으로 떠나올 적 친정 집 내 방에 있던 것을 지하실 한 쪽 구석에 옮겨놓았는데

일하던 아이가 헌 책들과  함께 엿 바꿔 먹었다는 건 너무 어이없는 스토리였다.

그럼에도 중요함의 기준은 언제나 내 고집에 의한 것이던 터라,

발 동동 구를 일에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의지는 분명히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런 상장 대신 내 방 벽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한 채 붙어 있던 것은,

오빠가 방 정리 한다며 한 쪽으로 치워 둔 것을 가져다 붙인,

카우보이 옷차림의 클린트이스트우드가 담배 피우는 옆모습의 포스터였다.

내 생각에 그 당시의 클린트이스트우드는 한국에서의 인기가

이소룡에게 밀려나듯 오빠 방에서 밀려났던 게 아닌가 싶다.

구하기 쉽지 않던 미국 배우의 커다란 포스터의 반짝이고 미끄러운 질감이 좋아

황야의 무법자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흐르는 것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듯  따르며 꿈꾸었었다.

이다음에 난 황금박쥐로 살거나 슈퍼맨도 좋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투명인간도 괜찮다며,

딱 유치원생처럼, 누가 알까 창피할 실없는 생각도 마음대로 아니겠느냐며 빙긋 웃기도 했다.

하지만 어쩜 그 시기란, 기실 허깨비 상상 속에 누가 자리 잡았는지

혹은 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을, 그저 모호함 뿐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정말 무엇이 되고 싶기 보다는 지금의 갑갑하다 느껴지는

나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아서다.

그 불만을 제거함으로 이상을 지니는 바탕에 토대를 가지게 되는 거라고 규명할 수는 없지만,

탈출의 시도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의 부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던 시기.

 

그거였다.
바로. 아직 한창 사춘기였던, 확인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작지만 거친 호흡이었던 거다.

학교 가다말고 그 당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천행 국철을 타고 항구로 향한다든지, 

밥 먹듯 수업 빠지며 캄캄한 강당에 누워있는 내게 찾아온 반장은

뒷마당 덩굴 벤치 아래의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전했고.

규율부이어서 어렵지 않게 학교 시간 중 뒷문으로 빠져나가

바로 앞 고궁 옆문을 통하면 있던 연못가 벤치에 앉아

몇 시간이고 책을 읽다 종래가 거의 끝날 시간이 되어서야 학교에 돌아간다던지,

그래 선생님이 내 환경기록부를 들춰보기 전에는 

가정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는 학생인 줄로 여겨진다던지,

수학 선생님에게 사르트르의 구토를 선물 받은 학생으로

마흔 넘은 독신 여선생님과 동성애 한다는 소문으로 술렁이게 한다던지,

머리카락 길이 귀밑 1센티로 정해져 있던 학교 규칙에,

그렇지 않아도 숨 막혀 하던 애들 앞에

귀 위 1센티로 자르고 교문 앞에 나타나 모두 질리게 한다던지

그러면서도 1년에 단 한 명도 잡지 않는 규율 어기는 것을 재미로 알던 학생들에겐

바보같은 허술한 규율부쯤으로 인식되었다던지...

하루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던 내가

반에서 제일 떠드는 아이 적으라는 무기명 투표에 뽑힌 아이러니 등…….

전체적으로 비사회적이며 단체에 부적합하게 보여 선생님도 잘 건들지 않고

은근히 동갑내기들에게는 친구 하자는 편지만 수백 통 받으면서도

밖으로는 늘 혼자 다녔고 그러면서도 외로움은 타지 않던 시기. 

그렇게 난 학교에선 언제나 조용한 소음이고 어설픈 말썽꾸러기였다.

 

주위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하거나 그런 대상으로 보였던가 싶어도,

실제로 가슴속은 타인으로 부터 자신을 방어할 날카로운 손톱 하나 가지고 있지 않던

나약한 아이였던 지내온 사춘기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은

가장 웃고 함께 즐기는 것에 활동적이었어야 했을 그 시기 또래들과는 달랐는데,

어쩌면 살아가는 것에 대해 시시해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정 반대였을,

그 방법이 달랐을 뿐 자기가 속해 있는 굴레로부터 해방된 듯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자,

밖이 아닌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을 처음 적은 것은 어느 해의 마지막 날,오랜만에 하늘 뚫어진 듯 비내리자 

그 빗줄기가 된 듯 닿는 대로 흐르는 대로 따르며 한참을 꺼내 읽은 이 글 속에 하는 일 없이 두 손 놓고 앉아 있다.

무엇으로든, 어째서든, 난 요즘 좀 아팠으며, 그만 털고 일어나고 싶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자신에게 했던 말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이며...

 

20061231 Davis에서 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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