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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렘이 이끄는 생 (詩와수필)/Like everyday life 1

1. 내 그리운 벗 다케마사 상

by HJC 2009. 12. 2.

 

2006

 Davis in California. Photo by 華雨 

 

호수로 가는 길에서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지나는 남자를 본다
건장한 체격에 나이도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 않는데도 심장이 좋지않은 걸까..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한 15미터쯤 뒤에 게으른 개가 풀숲에서 킁킁 뭔가 냄새를 맡고 다니기에
손사래를 쳐 그 개를 주인 쪽으로 내몬 후 가던 길 다시 가는데... ...

저 먼 기억으로부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1. 내 그리운 벗 다케마사 상 사진. 글. 華雨
 
삐~~삐~~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이제 막 저녁식사를 시작했던 난,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음성을 들었다.
아, H 상, 저 다케마사입니다. 늦은 시간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혹 오늘 섬에서 자이로 짱을 보지 못 했나요?
다케마사 상의 음성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분의 애견인
자이로 짱이 보이질 않아 찾으시는 것 같았다. 

 

오죽 급하셨으면 전화를 먼저 하는 것이 상식이실 분이 저녁 시간에  만션(맨션) 3층의 프론트 데스크로 찾아오셔서 인터폰을 누르셨을까..

그런 그분에게는 지금 자이로 짱을 같이 찾아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식사를 하다 말고 재킷만 걸친 채 얼른 15층에서 현관으로 뛰어내려갔는데,
이미 어두워진 골목의 불빛 아래로도 그분의 안절부절 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다케마사 상, 무슨 일이세요? 자이로 짱을 어디에서 잃어버리셨는데요?
아노네...
그렇게 시작한 그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10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온, 털빛이 밤 색깔이라 자이로라 이름 붙인 자이로 짱을 데리고
여느 때처럼 주말 낮에 슈퍼에 갔고 그 수퍼 앞 공터에 있는 나무에 자이로 짱의 끈을 드리워 놓기만 한 채 장을 다 보고 나와보니,
강아지가 온데간데 없어졌더라는 거였다.
얼마 전에도 앞 다리가 시원찮아 가축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자이로 짱이
이 섬 안에서 저 혼자 가면 어디를 갈 수 있었겠느냐며 걱정으로 음성마저 가늘게 떠시던.... 
 
내가 내 엄마와 같은 나이이신 다케마사 할머니를 만난 것은 십몇 년 전의 어느 날로,
대지진이 일어났던 해인 1995년의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만션은 32층 건물로 1,2 층이 주차장으로 되어있고,
3층에 영어를 구사하는 직원들로 구성된 프론트 데스크가 있었다.
그리고 4층엔 국제 규격의 실내수영장 등 골프 연습과 휘트니스,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각종 시설들이 있는 외국인 거주전용 만션이었다.
특정인들 전용이었기에 실상 외부인인 일본인들은 그 부대시설들을 사용 할 수 없게 되어있었지만,
일본인일지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보다 약 3배의 값을 지불하고 멤버십을 구매하면
내부시설을이용할 수 있긴 했다. 그런 까닭에 실상은 일본 안이었지만 일본인이 별로 많지 않았던 곳이다. 
 
어느 겨울 밤,  난 느즈막히 수영장으로 내려가
그 안의 자구치じゃくち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군 채 쉬고 있는데, 
바로 그 저녁이 다케마사 상이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넨 날이었다.
일본에 체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기에 간단한 질문에도 겨우 대답 하는 정도로 일어가 서툴렀지만
그분은 나와는 반대로 그 연세에도 더듬더듬 내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려하셨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다케마사 상은 종합병원에 딸린 병원 약국을 여섯 개나 가지고 계시는
왕성하게 사업을 하시는 70대의 할머니 사장님이셨다.

그 날 이후 일단 한 번 사람을 알게 되면 그 후 자주 눈에 띄게된다는 말이 사실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비단 실내수영장 안에서 만이 아닌, 나 자신도 힘들어 따라 하기를 주저하던
에어로빅 초보자 클래스에서도 외국인들과 함께 율동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이라고는 러닝머신에서 걷기 밖에 하지 않는 난,
그분의 젊은이 못지않은 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션으로 매일 운동하러 오시던 그분의 제안에 따라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정기적으로 함께 식사를 나누기 시작했고,
서로 다른 언어지만 소통의 시간도 가지며 그리 멀지 않은 교토로 함께 놀러가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몇 번이고 다녀오셨을 교토를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나를 위해 또 가셨던 그분,
다케마사 상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내 쪽에서 같이 가시지 않으실래요.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속으로 참 감사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함께 신칸센을 타고 오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정 엄니와 동갑이신 그분의 팔짱을 끼고 교토의 아름다운 모미지(가을단풍)를 구경 하던 순간은
지금도 내게, 가을...하면 떠오르는, 영원히 잊을 수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날 내가 먹은 점심은 강원도 명성 콘도 옆 어디쯤의 두부의 고소함이라도 맛보겠다며 줄을 섰다가
40분을 기다려서야 겨우 먹을 수 있었던 식당처럼,
연 두부를 뜨거운 물에 담가 내온 맹탕 같은 두부음식이었는데
이번에는 고소함을 맛보기 위함이 아닌
그래도 그 주위의 관광지 음식으로는 가장 싸다는 이유로
내가 고른 거였다.
나머지는 1인분에 모두가 2만 엔(이십만 원)이 넘기에
너무 부담드릴 것만 같아서 양이 적은 걸 먹고 싶다며 간단히 먹겠다고 말씀 드렸었다.
그러나 그 두부 한 모 나오는 것마저도 한 대접에 1996년 당시 오천엔(오만 원)이었던걸 생각하면
정말 교토 관광지는 음식 값이 금값이었다.
가다가 다리가 아파 잠시 쉬러 들어갔던 기사 탱에서 피로 회복에 좋으니 마셔보라며 
'아마 자케'라는 차를 시켜 주셨는데 그 차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 식해를 뜨겁게 해 
그럴싸한 차 그릇에 담아내어 온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전통음식에 대해 말을 나누다보니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거슬러 올라가 증조할아버지께서 중국인이라는 할머니의 뿌리에 대해서도 듣게되었다.
거창하지 않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작으면서도 결국 한 가지인 인류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나를 버스를 태워 안내하고 싶지 않다시며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택시로 다니셨고
지나치게 사양 하는 것도 죄송해서 대신 작으나마 다른 대접을 하려는 내게
나이 든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라며 부러 꾸짖듯 거절하셨다.

 

인도에서 착취 해다 진열해 놓은 삼천불상이 있는 신사(절)엘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다,
날씨도 화창한데 천천히 걸어가자고 한 내 제안에 마지못해 따르셨는데,
우리는 결국 길을 잘못 들어 한없이 헤매고 다리가 아파 못 걸을 지경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작은 찻집에라도 들어가 다리를 좀 쉬려는데
그런 기사뎅조차 보이질 않아 얼마동안이고 찾아 헤매다 
겨우 한 곳을 발견해 반가운김에 바로 들어갔다.
그런데 힘들게 찾아들어간 기사뎅이란 곳이, 달랑 탁자 세트 세 개와 구석의 어질러진 신문지,
가게 전체에 벤 담배 냄새와 주인 할머니의 가꾸지 않은 모습까지
심드렁(?)한 분위기로는 더 이상의 구색을 맞출 수 없겠다 싶을 만큼 누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다케마사 상과 난, 다리 아픈 것을 쉬어가게 되게 되었다는 것 한 가지 해결됨에 만족하자며 
커피 맛이야 어떻든 잠시 쉬다가 나왔는데
그곳에서 바로 다음 골목으로 돌아서자 바로 눈앞에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멋진 카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있는 카페촌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우린 그 길 한가운데에서 마주보고 선 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마치 사춘기 소녀들처럼 깔깔 대며 웃기 시작했다.
 
인생은 살다보면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겪기도 하게되는데
결국 돌아보면 그때 왜 조금 더 찾아보지 않았던 걸까. 왜 조금 더 참지 못했을까.
등 후회와 반성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쩌면 복불복이라는 생각도 든다.
분위기 좋은 카페야 언제든 들어가도 괜찮지만,

다리가 너무 아파 한 발자국도 더 못가겠다던 그때의 다케마사 상과 나에게는
허름한 그 카페 의자에 앉아 잠시 쉬는 것이 약이었고
더 이상의 다른 만족을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기에 그것으로 고마울 일이었다.

 

물론 조금 더 가면 좋은 곳이 있는데…….라고 누군가 귀띔 해주었다면 마음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으나,
살며 늘 눈앞에 표지판이 있는 것이 아니듯 그 순간이  구하다 얻어진 것이라면,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는 목표에 불만족한 상황이었다 해도 
그르친 것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러게 살아가는 일이란,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갖게 되는 평생 가는 사랑으로 생긴 외로움처럼 ,
자신도 어쩔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돈이나 사물로 인해서는 후회할 일이 아니아야 하며
살면서 쓸데없는 욕심을 키우지 않아야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도 적을 거라는 생각이다.



   계속...



   - 글  정혜정